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쟁쿠르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사료 대부분이 그렇듯 정확한 내역을 알 수는 없으나 현대 역사가들의 의견으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보다 '''최소''' 2배 이상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사료에서는 당연히 자기들이 유리하게 서술하려는 구석이 있다보니 영국측 자료에서는 사료에 따라 '프랑스군이 '''10배'''가량 많았다.'라는 언급도 있었으며 반대로 프랑스 사료에서는 '아일랜드군의 군세보다 아무리 많아도 '''4배'''가량이었다 정도의 언급만 나온다.] 좁은 전장을 완전히 틀어막기 위해 잉글랜드군의 맨앳암즈들이 일렬에 가까운 얇은 선형진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 모두의 기록에 언급된다. 이는 나중에 언급되듯이 백병전이 시작된 순간 잉글랜드군의 전열이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병력의 질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비교될 부분이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군은 공성전으로 인한 병력 감소 및 사기 저하, 퇴각경로 및 전투 장소의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 창궐[* 설사가 잦다는 식의 언급을 보면 정황상 이질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추측된다.] 등으로 상황이 나빴던 것에 비해 막 모집해 달려왔던 프랑스군은 이런 문제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자기 부대를 선봉에 보내달라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전장은 주변에 숲이 빽빽한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는데, 프랑스군은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대로 선발대를 제외하고선 기사들 포함 전군이 말에서 내린 채 걸어서 진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이 전술은 제대로 효과를 봐서 말을 타고 갔던 선발대가 아닌, 본대의 기사들은 큰 피해없이 잉글랜드군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프랑스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계획 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편견과 달리 달브레와 부시코는 전투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기동부대들을 하마 맨앳암즈 중심의 야전군으로 재편한 채 잉글랜드군을 맞이했다. 후위에 배치된 800~1200기의 정예 기병들이 잉글랜드 궁수들에게 기습적으로 돌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하고, 약 4천명의 쇠뇌수들이 제압 사격을 퍼붓는 동안 주력인 중보병대가 잉글랜드군 대열에 안전하게 접근하며, 그 사이에 소수의 분견대가 진영을 우회해서 포위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을 한 번의 전투로 섬멸하는 것이 당초에 입안된 작전이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f618c4b663cf00b205ea5104d6d7301.jpg]]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잉글랜드군이 먼저 방어 진영을 해체하고 장궁의 사거리 안으로 진격해서 프랑스군 진영에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기병 말뚝을 뽑아내고 다시 설치하는 사이 잉글랜드 궁수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지만 정작 그 궁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배치된 프랑스 기병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브르타뉴의 기욤의 연대기는 롬바르디아와 가스코뉴 출신 기병들이 궁수들의 위협 사격에 겁을 먹고 돌격을 거부했다고 비난한다. 반면에 질 르 부비에의 연대기는 기병대의 지휘관인 클리네 드 브라방과 루이 드 부르봉이 잉글랜드군이 먼저 공격을 가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람에 기병들이 대부분 불가에 앉아있거나 말을 돌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간밤에 내린 폭우가 겨울 파종을 위해 경작된 밭을 드넓은 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헨리는 이를 믿고 언뜻 무리해보이는 공세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 기병대가 뒤늦게나마 예정대로 공격을 개시했지만, 진창 위에서 1천 기에 달하는 기병들이 대열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절반 가량인 400기만이 출격했다. 결국 기병들은 장궁병들이 정면에서 퍼붓는 사격과 대기병 말뚝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주한다. 연대기 작가들은 이 대목에서 기사들의 비겁함과 파벌 간의 질투심, 그리고 부족한 규율을 비난하지만 그전에 지형부터가 기병 돌격에 매우 불리했다. 게다가 [[기병]]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대열의 두께는 기병 부대의 사기와 돌파력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기마돌격에 참가하는 인원이 줄어든 것 역시 기병들 입장에서는 심각한 손해였다. [[파일:external/orig15.deviantart.net/battle_of_agincourt_by_wraithdt-d948orf.jpg|width=700]] 이어서 프랑스 보병대가 진격했지만, 당초에 계획된 쇠뇌수들의 지원사격은 없었다. 와브랭에 따르면 전장이 좁아서 [[맨앳암즈]]와 궁수들을 동시에 투입할 공간이 없었고,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하마 맨앳암즈 대열의 선두에 선 귀족들이 궁수들의 지원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맨앳암즈들은 정면 사격에 취약한 급소인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 면갑을 내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얇은 면갑이 화살에 관통당할 가능성을 두려워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화살비와 아군 방향으로 패주하는 기병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등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잉글랜드군 대열에 이르러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의 얇은 선형진을 6피트에서 12피트 정도 밀어붙였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잉글랜드 군종사제들이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울부짖듯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파일:agincourt_mudbath_by_ethicallychallenged-d988gqd.jpg|width=500]] 하지만 [[맨앳암즈]]들의 얇은 대열은 기적적으로 공격을 버텨냈고, 양익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2배 이상 두꺼운 프랑스군 대열을 역으로 밀어내거나 돌파해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헨리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타구니를 검으로 찔리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 정도로 치열한 백병전이었다. 화살이 떨어진 궁수들도 검, 단검, 도끼, 말뚝 고정용 나무망치 등을 들고 백병전에 참가했고, 유일한 이점이었던 숫자에서 비롯된 응집력을 잃은 프랑스군은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패주하는 맨앳암즈들을 추격해서 많은 포로를 붙잡았을 때, 헨리는 프랑스군 후위의 예비대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포로들은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잉글랜드군에는 이들을 포박할 시간과 감시할 인원이 부족했고, 전장 곳곳에 도망자들과 전사자들의 무기가 널려있었기 때문에 포로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전투를 시작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헨리는 향사 한 명과 궁수 200명에게 중요하지 않은 포로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부르고뉴의 기사 길베르 드 라누아는 잉글랜드군이 포로들을 근처의 농가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고 회상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를 근거로 프랑스군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 자체가 헛소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되는 증언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어느쪽이 진실이든 잉글랜드군이 빠르게 전열을 갖추고 진격해오자 프랑스군의 후위는 반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전투 도중 소수의 프랑스 맨앳암즈들과 현지 농민 징집병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분견대가 잉글랜드군 후방에 남겨진 짐마차들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투 이전에 작성된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에 언급된,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소규모 분견대와의 유사점 때문에 흔히 오해받지만 이들은 공격이 아니라 순수한 약탈이 목적인 부대였으며 이 습격에 의해 발생한 인명 피해를 언급하는 연대기는 하나도 없다. 페닌과 몽스트렐레의 연대기에서는 포로들을 죽이라는 헨리의 명령이 이 습격 때문에 내려졌다고 주장하지만 잉글랜드군 후방에서 전투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익명의 군종사제의 연대기에는 정작 그러한 인과관계가 암시되지도 않는다.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의 신하였던 티토 리비오의 연대기에서는 심지어 헨리가 전투가 끝난 뒤 저녁에 메종셀르에 도착할 때까지 짐마차가 약탈당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습격은 당대의 잉글랜드인들에게 분노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이때 도둑맞아 파리로 전달된 헨리의 왕관을 본 프랑스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한 줄 알고 환호하다가 패잔병들이 뒤늦게 도착하면서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민담까지 만들어졌다. 딘터의 연대기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선봉 기병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클리네 드 브라방이 잉글랜드 궁수들을 제압하는 임무에 실패한 뒤 전장을 벗어나서 잉글랜드군 후방에 숨어들어 귀중품을 훔쳐 달아났다고 주장한다. 딘터는 부르고뉴 공작의 신하였고 클리네 드 브라방은 아르마냑파였으므로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는 알기 쉽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